읽게 된 계기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우선 어머니가 추천해준 책들 중 한 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책들 중 내가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게 된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다음과 같은 반가운 문장을 마주친 것이다.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었다. (중략) 그래서일까?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해 늘 자기혐오에 빠졌다.

청년에 대한 내용을 읽자마자 내 이야기인가 싶어 솔깃했다. 책을 읽는 내내 청년의 말투도 참 성가시지만 나와 비슷한 면이 많다고 느꼈다. 이렇게 청년의 상황에 나를 대입한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동기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나에게 아주 적절한 처방을 해주었고, 행복해질 용기를 내도록 도와준 고마운 책이므로 내용을 자세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원인론

원인론의 본질은 다음의 명제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의 사건(원인)이 현재의 나(결과)를 규정한다.

원인론은 원인이 결과를 지배하고,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라는 허무주의적 관점을 펼친다.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원인론의 한계는 분명하다.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전부 과거 사건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33쪽)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컨대 책속의 청년은 친구가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이유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청년의 논리에 따르면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모두 청년의 친구와 같은 결과, 즉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야 앞뒤가 맞다.

또다른 예시로 철학자는 감기로 심한 열이 난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과정을 든다. 의사가 “환자 분이 감기에 걸린 것은 어제 옷을 얇게 입고 나갔기 때문입니다”하고 진단을 내렸을 때 만족할 환자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의사라면 과거의 원인만 짚어내기보다 현재 환자의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약을 처방하거나 주사를 놓을 것이다.

목적론

위와 같은 이유로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는 원인론과 대치되는 목적론을 옹호한다. 목적론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변할 수 있다“를 전제로 한다. 왜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목적론은 과거의 원인이 아닌 현재의 목적을 본다.

목적론의 세상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양식(lifestyle)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아들러에 따르면 생활양식이란 삶에 대한 사고나 행동의 경향을 가리킨다. 한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 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다. 성격 대신 생활양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성격이란 말에는 변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생활양식이라면 변용시키는 것도 가능할 테기 때문이다. (59쪽) 다시 말해 생활양식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므로 다시 선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목적론이 세상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통해 좀더 살펴보자.

  1.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위 원인론에서 언급한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청년이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여긴 친구는 철학자에 따르면 사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다. 가령 그 친구가 ‘나는 부모에게 학대받아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38쪽) 왜 이런 목적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내내 방 안에 틀여박혀 있으면 부모가 걱정을 해주고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즉 과거의 경험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현재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37쪽)

  2.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철학자는 분노를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고 말한다. 전화가 오면 순식간에 집어넣었다가 전화를 끊으면 다시 꺼낼 수 있는. (43쪽) 예컨대 청년은 별 것 아닌 일로 웨이터에게 큰소리를 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청년이 분노라는 감정에 지배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큰소리를 내고자 하는 목적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는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더 값싼 수단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42~43쪽) 만약 청년의 목적이 큰 소리를 내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는 굳이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목적론에 따르면 인간은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감정은 수단에 불과하다.

  3.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

    지금 내가 불행한 것은 내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55쪽)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며 불행해 하는 까닭은 무엇이 주어졌느냐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물론 이러한 선택이 늘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선택에는 외적 요인, 즉 인종과 국적, 문화, 가정환경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행한 상태를 선택한 장본인이 나 자신임은 변치 않는다.

위 세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전제와 상통한다. 과거의 경험이나 감정, 주어진 것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부여한 의미 즉 스스로 선택한 생활양식에 따라 어떤 삶을 살지가 결정된다. 변화의 선택권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가? 그들이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가? 지금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여태까지의 경험을 통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반면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생활양식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생활양식을 바꿀 수 있는가?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한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바로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세계와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생활양식)에 따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법, 그리고 행동도 변할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나’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 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63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들러의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부른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무서워한다. 즉 그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도 이유를 댈 수 있다. 나는 이런 단점이 있어 거절당했다고, 이런 단점만 없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스스로도 의도했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이에 우리는 일단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열등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예컨대 “나는 못생겼어” 라는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인간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객관적인 ‘열등성’이 아닌 주관적인 ‘열등감’이다. 즉 내 키를 장점으로 볼지 단점으로 볼지는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는 못해. 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가 있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네.

아들러는 열등감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인정했다. 열등감 자체는 사실 조금도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 향상되기를 바라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 즉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내면에 자리한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전진하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열등감이 아니라 열등 콤플렉스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콤플렉스’라는 말이 열등감과 같은 말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아들러에 따르면 콤플렉스는 ‘복잡하게 얽힌 도착적인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열등감과는 무관하다. 그중에서도 열등 콤플렉스란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나는 못생겼기 때문에 결혼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열등 콤플렉스이다. 이는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인과관계가 없는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열등 콤플렉스의 또다른 측면은 우월 콤플렉스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A라서 B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A만 아니면 나는 유능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셈이다. 우월 콤플렉스란 마치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우월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권력자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짓 어필함으로써 그를 통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한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것일 뿐.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봐 겁이 나니깐. 이것이 바로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이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열등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들러가 앞서 말한 인간의 본능인 “우월성 추구”란 남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경쟁 의사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성별, 연령, 지식, 경험,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존재이다. 그 차이를 선악이나 우열과 엮어선 안된다.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

모든 인간은 대등하며 같은 길을 걷는다.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있다.

인생의 과제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다”는 의식을 가질 것

마주친 글귀

철학자: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를 유지한다네. 이것은 누가 측정하든지 간에 똑같은 객관적인 수치지. 하지만 여름에 마시는 우물물은 차갑게 느껴지고, 겨울에 마시는 우물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네. 온도계는 늘 18도를 유지하지만 여름과 겨울에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청년: 요컨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착각하게 된다?

철학자: 아니, 착각이 아닐세. 그때 ‘자네’가 우물물이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네.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거지.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주관에 지배받고 있고,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지금 자네의 눈에는 세계가 복잡기괴한 혼돈처럼 비춰질 걸세. 하지만 자네가 변한다면 세계는 단순하게 바뀔 걸세. 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라는 점이라네.

세계가 어둡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벗으면 되네. 맨눈에 비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눈이 부셔서 절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르네. 다시 선글라스를 찾게 될지도 모르네. 그래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있을까?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그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네. 아들러파의 존재 자체가 잊혔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사상이 일개 학문에서 탈피하여 사람들의 상식(common sense)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28쪽)

청년: 이 세계는 평등하지 않으며 지금도 인종이나 국적, 민족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니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해요.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은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요!

철학자: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자네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집착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나? 우리는 교환이 가능한 기계가 아닐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

철학자: 아니,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청년: 내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철학자: 그래,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일 뿐이며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 –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 – 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첫날 말했던, 집에 틀어박혀서 지내는 사람들은 곧잘 불행을 무기로 하는 우월감에 빠지네. 아들러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가진다“라고 지적했을 정도야.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삶이 조금 편해졌다고 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