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적의와 무관심으로 점점 더 추워지는 잿빛의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무기로 승리를 바라는 것이 가끔은 터무니없는 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바로 미움은 기세가 좋은 순간에서조차 늘 혼자다. 반면에 도망치고 부서지고 저물어가면서도 사랑은 지독히 함께다. 사랑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 Love Wins All 소개글

나의 가치관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변증법적 사고이다. 변증법적 사고란 이성적 주장을 통해 진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두 명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담론으로 정의된다. 다른 말로는 인간사의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성질을 염두에 두고 다각도에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변증법적 사고의 예를 들어보자.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로를 상업화한 유소유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 만약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법정스님을 "나쁜 편"으로 분류하게 된다. 반대로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모순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면 법정스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나쁜 편"으로 분류하게 된다. 하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모순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도 "나쁜 편"으로 분류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편을 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보면 누구나 이 정도의 모순은 가지게 된다며 법정스님을 이해하는 것과 심심한 위로의 말을 눈속임으로 느꼈을 수 있다며 비판론자들을 이해하는 것이 꼭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인간이 개입된 세상사에는 여러 가지 면이 공존하는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성질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면,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를 멀리하고 변증법적 사고를 선택하면 무언가가 단편적으로 “싫다”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혐오가 생기는 일이 적어진다.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 한다. 과거 설리에게 악플을 남기고도 자신이 악플러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설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를 보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잃게 되었음에 슬퍼하는 것을 보면 분명 공감 능력이 있는 인간임에도 왜 혐오를 표출했던 자기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변증법적 사고를 실천한다면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종종 인터넷 세상의 글들을 보다보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겠다 싶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익명의 탈을 쓰고 작성하는 날이 선 말들에 피로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애초에 잘 안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직접 유튜브와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가끔 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말을 서슴없이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아주 못된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종종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어지거나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는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말에 전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서는 누구나 짓궂은 생각을 하지 않는가. 다만 변증법적 사고, 아니, 꼭 변증법이 아니더라도 잠깐이나마 말을 내뱉기 전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살필 여유를 가진 사람이 많아진다면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삶이 각박하고 힘들 때는 이런 여유를 가지기 쉽지 않다. 왜 영화 <기생충>에서 충숙이 "나도 돈 있으면 더 착해질 수 있어!"라고 외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히 보여지고 상처 받는 사람이 될지언정, 상처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신을 지키며 살고자 한다. 누구나 조금씩은 부족하다.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 어떤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자 하는 작은 분투에서 따스함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